트럼프 행정부가 인공지능(AI) 산업에 공식 규제 대신 사례별 개입과 행정명령, 자발적 검토 프레임워크를 통해 사실상 광범위한 정책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백악관은 AI를 규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수출 통제·정부 조달 기준·보안 심사 요건이라는 도구를 통해 AI 기업들이 따라야 할 규칙을 비공식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명문화된 규정 없이 운영되는 이 체계는 ‘그림자 AI 정책’으로 불리며 업계 전반에 불확실성을 가중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초기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AI 관련 요건들을 철폐하고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논거 아래 규제 완화를 AI 아젠다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 운영 방식은 당초 표방한 시장 자율 원칙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특정 기업을 대상으로 한 개별 협상, 행정부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설계한 자발적 검토 체계, 그리고 연방 정부 조달 기준 등이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산업 규범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공식 규칙 제정 과정 없이 운영되는 만큼 기업들이 참고할 공개 기준이 거의 없고, 행정부의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한 상태다.
구체적인 사례는 앤트로픽(Anthropic)과의 협상에서 두드러진다. 앤트로픽과 행정부는 최신 AI 모델에 대한 수출 통제 완화 여부를 놓고 교섭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 과정 자체가 명문화된 규정이 아닌 당사자 간 협의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주요 AI 연구소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라 일부 첨단 AI 모델에 대한 정부 자발적 검토 프레임워크에 어떻게 부응할지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다. 또한 연방 일반서비스청(GSA)은 LLM(대규모 언어 모델)이 정부 정보를 처리할 때 적용할 데이터 보호·보안 기준을 담은 새로운 규정을 검토하고 있어, 공식 조달 지침이 사실상 사업 요건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AI 입법 권한을 둘러싼 헌정 구조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본래 법률 제정은 의회의 권한이며 행정부는 그 법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의회가 명확한 국가 AI 규제 입법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행정부는 주(州) 수준의 AI 법안 효력을 차단하거나, 국가 안보와 사이버 안보 차원에서 특정 모델을 심사하거나, 연방 조달 기준을 통해 기업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영역을 채워나가고 있다. 수출 통제, 자발적 테스트 프레임워크, 조달 지침 세 가지가 이른바 ‘그림자 AI 정책’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G7 정상회의 기간 오픈AI(OpenAI)의 크리스 레한(Chris Lehane)이 AI 표준을 위한 글로벌 포럼 가능성을 언급하며 AI 최고경영자(CEO)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 행정부가 주도하는 비공식 정책이 국제 AI 거버넌스 논의에서도 의제를 설정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AI 기업들이 미국에 기반을 둔 만큼, 행정부의 입장 변화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AI 정책보다 즉각적이고 폭넓은 파급력을 갖는다.
이러한 구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지점은 ‘불확실성’이다. 명문화된 규칙이 없으면 기업들은 정책 자체보다 행정부 담당자의 성향이나 더 넓은 정치 역학에 따라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앤트로픽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출 통제 완화 여부가 공개된 기준이 아니라 개별 협상의 결과로 결정된다면, 같은 기술 역량을 갖춘 다른 기업이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규제보다 예측 가능성을 더 원한다는 업계의 오랜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체계가 미국 내 스타트업과 중소 AI 기업에 미치는 영향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대형 AI 연구소는 정부와 직접 협상 채널을 갖추고 로비 역량도 있지만, 중소 기업은 그렇지 않다. 명문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규제 방향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데는 자원과 인맥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그림자 AI 정책’은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같은 대형 플레이어에게는 협상 레버리지를 활용할 여지를 주지만, 정책 접근성이 낮은 소규모 기업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규제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이 구조는 사실상 대형 기업 중심의 AI 생태계 고착화를 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 환경 측면에서도 우려할 지점이 있다고 판단된다.
글로벌 맥락에서 보면 이 상황은 더욱 복잡한 함의를 지닌다. G7 현장에서는 미국 AI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기술 주권’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각국 정상들은 자국 AI 생태계를 육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AI 모델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는 현실을 인정했다. EU AI법이나 영국의 온라인 안전법처럼 명문 규정을 갖춘 체계와 달리,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은 공식 입법 절차를 밟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3국 입장에서는 더욱 대응하기 어렵다. 상대방이 어떤 규칙을 따르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 AI 산업에도 이 구도는 직접적인 파급 효과를 낳는다. 한국 AI 기업들은 미국 수출 통제 체계의 변화, 특히 반도체와 첨단 AI 모델 관련 조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수출 통제가 미국 정부와 특정 기업 사이의 개별 협상 결과로 운영된다면, 한국 기업은 미국 파트너나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결정의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국내 AI 스타트업들이 미국 기반 API나 컴퓨팅 인프라를 활용하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미국 정부의 조달 기준이나 보안 요건이 사실상 국내 기업의 운영 기준으로 스며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글로벌 AI 규제 지형을 살펴보면 이 현상이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체계의 근본적 취약성은 지속 가능성 문제로 이어진다. 명문 규정 없이 운영되는 정책은 정치 환경이 바뀌면 방향도 급격히 달라질 수 있다. 행정부 교체나 주요 담당자 교체만으로 AI 수출 통제나 자발적 검토 프레임워크의 기준이 뒤집힐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불확실성을 감안한 리스크 관리가 불가피하다. 반면 명문 규정 없는 개입이 역설적으로 유연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는 시각도 있다. 기술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른 AI 분야에서 경직된 입법보다 사례 대응 방식이 실용적일 수 있다는 논거다. 그러나 이 유연성이 기업에게는 적응 기회보다 불확실성 비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한 규제 틀에 대한 업계의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번 그림자 AI 정책 구도가 장기화될 경우, 국제 AI 거버넌스 전반에 ‘비공식 기준의 사실상 표준화’라는 선례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자발적 테스트 프레임워크나 수출 통제 기준이 명문화된 국제 조약이나 표준 없이도 사실상 세계 AI 산업의 운영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정책 주권을 행사하기 더 어려워진다. 한국을 비롯한 주요 AI 개발국들이 독자적인 AI 규범 체계를 갖추고 국제 협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이 문제에 대응하는 현실적 방법이지만, 그 속도가 미국 행정부의 비공식 정책 확산 속도를 따라잡기에 충분한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앤트로픽과 수출 통제 협상 동향이 이 구도의 실제 작동 방식을 가늠하는 리트머스가 될 것이다.
앞으로 관건은 이 비공식 체계가 어느 정도의 예측 가능성을 갖출 수 있느냐다. 의회가 AI 입법에 나선다면 지금의 그림자 정책은 공식 규제 틀 안으로 통합될 수 있다. 반대로 입법이 지지부진하다면 수출 통제·조달 기준·자발적 프레임워크라는 세 축이 더욱 정교해지며 사실상의 AI 규제 체계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경로를 택하든, 미국 행정부의 AI 관련 결정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모델들의 본국으로서 국제 AI 질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