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미국 벤처캐피털이 집행한 투자금 가운데 86%가 인공지능(AI) 기업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PitchBook)과 전미벤처캐피털협회(NVCA)가 7월 9일 밤 공개한 2분기 벤처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상반기 미국 벤처 딜 규모는 4127억 달러로 지난해 한 해 전체를 30% 가까이 웃돌았다. 그러나 이 급증분의 거의 전부는 소수의 초대형 AI 라운드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단순히 AI가 많은 돈을 끌어모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금이 상위 소수 기업에 집중되고, 그 아래 넓은 스타트업 층으로 흘러가는 돈이 빠르게 말라가고 있다는 점이 이번 보고서의 핵심이다. 피치북은 이 흐름을 경기 순환이 아닌 구조적 변화로 규정했다. 자금 배분의 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진단이다.

4127억 달러 중 3559억 달러가 AI로
상반기 전체 벤처 딜 4127억 달러 가운데 AI 기업이 가져간 몫은 3559억 달러였다. 전체의 86%에 해당하는 규모다. 피치북은 이 쏠림이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이라고 봤다. AI 코딩 도구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비용을 낮추고, 파운데이션 모델이 창업자에게 자체 모델을 훈련하지 않고도 시작할 수 있는 기반 계층을 제공하면서 AI를 중심에 둔 창업과 투자가 표준이 됐다는 것이다.
돈은 위쪽으로 고였다. 2분기에만 10억 달러 이상 라운드가 7건 마감됐다. 앤트로픽(Anthropic),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안두릴(Anduril), 베이스텐(Baseten), 미러스(MiRus), 칼시(Kalshi), 코그니션 AI(Cognition AI)가 그 주인공으로, 이 7건을 합친 규모만 872억 달러에 이르며 이 가운데 5건이 AI 기업이었다. 가장 컸던 것은 앤트로픽의 650억 달러 라운드로, 이 투자로 앤트로픽의 투자 후 기업가치는 9650억 달러로 뛰어 오픈AI를 앞질렀다. 앤트로픽은 석 달 전 3500억 달러의 투자 전 기업가치로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번 라운드에서는 9000억 달러로 값이 매겨져 157% 뛰었다. 다만 표면 숫자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면이 있다. 약 150억 달러가 앞선 약정에서 이미 확정돼 있던 금액이어서, 실제로 새로 들어간 돈은 650억 달러라는 헤드라인이 시사하는 것보다 적었다.
대형 라운드가 상반기 집행액에서 차지한 비중은 87.5%에 달했다. 반대로 건수 기준으로는 여전히 시장의 대부분을 이루는 1억 달러 미만 딜들이 나눠 가진 금액은 다 합쳐 514억 달러에 그쳤다. 아래 표는 이 소형 딜이 전체 벤처 투자액에서 차지한 비중이 최근 2년 사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보여준다. 피치북 2분기 보고서 기준이며, 2026년 수치는 상반기 집계다.
| 시점 | 1억 달러 미만 딜 비중 |
|---|---|
| 2024년 | 43.8% |
| 2025년 | 33.1% |
| 2026년 상반기 | 12.5% |
불과 2년 전만 해도 전체 투자금의 절반 가까이가 소형 딜을 통해 넓게 퍼졌지만, 올 상반기에는 그 비중이 8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대형 쏠림의 반대편에서 새 유니콘도 나왔다. AI 훈련 플랫폼 기업 프라임 인텔렉트(Prime Intellect)는 7월 8일 1억3000만 달러 유치를 발표하며 기업가치 1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투자에는 엔비디아(Nvidia)의 벤처 부문 엔벤처스(NVentures), 인텔 캐피털, 델 테크놀로지스 캐피털이 참여했고 클라우드플레어 최고경영자 매튜 프린스 등 10여 곳이 이름을 올렸다. 이 회사는 개발자가 오픈소스 알고리즘을 커스터마이징해 모델을 훈련하도록 돕는 클라우드 플랫폼을 운영하며, 1000억 개 이상 파라미터의 자체 모델 인텔렉트-3과 6000여 고객사를 보유하고 있다. 펀딩 직전 연환산 매출은 1억 달러를 넘어섰다.
펀딩·엑시트·대출에 찍힌 같은 지문
집중 현상은 투자 집행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벤처 펀드 조성에서도 같은 지문이 찍혔다. 벤처 회사들은 상반기에 단 405개 펀드로 724억 달러를 끌어모았는데, 이는 지난해 훨씬 많은 수의 펀드로 조달한 749억 달러에 거의 맞먹는 규모다. 이 중 10억 달러 이상 대형 펀드가 495억 달러를 가져갔다. 안드리센 호로위츠가 142억 달러(7개 펀드), 스라이브 캐피털이 100억 달러(2개 펀드), 파운더스 펀드가 106억 달러(2개 펀드)를 조성해, 세 곳이 상반기 전체 펀드레이징의 48%를 차지했다.

엑시트도 기록을 세웠으나 사실상 한 회사에 기댄 결과였다. 스페이스X(SpaceX)의 2분기 기업공개(IPO)는 1조7000억 달러 규모로, 지난 10년간 미국 벤처 투자 기업의 엑시트를 전부 합친 것보다 큰 가치를 만들어냈다. 이 IPO는 750억 달러를 조달했고 거래 초기 시가총액을 2조 달러 위로 밀어 올렸다. 피치북은 이를 역대 최대 IPO이자 미국 벤처 기반 기술 기업 상장으로는 17배 격차의 최대 규모로 평가했다. 스페이스X를 빼면 분기 엑시트 가치는 최근 몇 년의 위축된 수준으로 되돌아간다.
대출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벤처 부채는 647억 달러에 달했지만 단 280건의 대출에 몰렸고, 스페이스X를 위한 200억 달러 리파이낸싱 한 건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대기업들이 자체 AI 비용을 감당하느라 현금을 쌓아두면서, 기업형 벤처 투자 부문이 참여한 딜 비중은 21%로 1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어느 지표를 봐도 돈은 소수의 큰 이름에 집중되고 있었다.
쏠림이 구조적인 이유와 한국 시장의 선택
이번 수치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나 몰렸나’가 아니라 ‘왜 되돌아오지 않을까’다. 피치북이 이 흐름을 순환이 아닌 구조로 규정한 근거는 창업 비용 구조 자체의 변화에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코딩 도구가 기반 계층을 제공하면서, 승부처가 ‘누가 먼저 만드느냐’에서 ‘누가 가장 큰 컴퓨팅과 데이터를 확보하느냐’로 옮겨갔다. 컴퓨팅이 곧 경쟁력인 국면에서는 이미 자본이 몰린 소수가 더 유리해지고, 자금 집중은 성과 집중을 낳아 다시 자금을 끌어당기는 되먹임이 작동한다. 피치북 애널리스트들이 경고한 지점도 여기다. 단일 테마에 이토록 의존적인 시장은 AI의 성장이나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광범위한 조정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벤처 특유의 멱법칙 구조는 위험을 더한다. 설령 AI가 약속을 지키더라도 수익은 소수의 승자에게 집중되고, 높은 밸류에이션에 자금을 조달한 넓은 층의 기업들이 그대로 위험에 노출된다.
소형 딜의 실종은 통계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초기 단계 자금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실험과 다양성이 살아남는 토양이다. 그 비중이 43.8%에서 12.5%로 줄었다는 것은 다음 세대의 후보군이 얇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의 승자들이 몇 년 전 소형 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파이프라인이 마르는 것은 생태계 전체의 장기 리스크로 볼 여지가 있다.
이 그림은 미국만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한국 벤처 시장 역시 AI 쏠림과 대형 라운드 편중이라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미국 데이터는 앞서 걷는 시장의 선행 지표에 가깝다. 자본이 파운데이션 모델과 대형 인프라로 몰릴수록, 자체 모델 훈련 없이도 성립하는 응용·수직 특화 영역이 상대적으로 남는 기회일 수 있다. 프라임 인텔렉트가 자체 초거대 모델 경쟁에 뛰어드는 대신 훈련·인프라 계층에서 유니콘이 된 사례는 그 방향을 시사한다.
다만 낙관만 할 일은 아니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자금을 조달한 기업일수록 조정 국면에서 후속 투자 단절 위험이 크다는 피치북의 경고는 한국 스타트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내 초기 투자자 입장에서는 ‘지금의 열기에 프리미엄을 얹어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소형 딜이 실종된 틈을 노려 저평가된 초기 기업을 발굴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남는다. 관건은 쏠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쏠림이 비운 자리를 읽어내는 안목이 될 전망이다. 앤트로픽과 오픈AI가 이미 비공개로 상장을 신청해 두 건의 추가 조 단위 엑시트가 예상되는 만큼, 하반기에도 이 집중 구조가 유지될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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