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 공급이 수요를 뒤따르지 못하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가 엔비디아 같은 GPU 제조사보다 가격 협상력에서 앞서는 이례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전문가용 AI GPU인 RTX Pro 6000 블랙웰(96GB)의 판매 가격은 출시 초기 8,500달러에서 현재 1만3,250달러(약 1,800만 원)로 1년 만에 50% 이상 올랐다. 일반적으로 신제품 출시 후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낮아지는 전자·반도체 시장의 관행과 정반대 흐름이다.
가격 인상 배경으로 업계는 고성능 메모리 수급 불균형을 주요 요인으로 지목한다. AI 서버와 AI PC 시장이 동시에 확대되면서 GDDR7, HBM 등 고사양 메모리 수요가 급증한 결과, 메모리 가격 상승분이 그대로 완제품 판매가에 전가되고 있다. 수요가 줄지 않는 시장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엔비디아는 올해 1분기(2~4월) 816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전년 동기 대비 85% 성장했다. 이 가운데 데이터센터 부문 매출은 750억 달러로 92% 늘었고, 블랙웰 기반 AI 시스템 수요가 실적 상승을 이끌었다.
메모리 업체의 협상 우위는 공급 계약 구조 변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SK하이닉스는 1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주요 AI·클라우드 기업들이 다년간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공급계약(LTA) 체결을 잇달아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공급 부족으로 모든 고객사의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증권 업계에서는 현재 체결되는 장기 계약이 단순 공급 약정을 넘어 구매 물량을 사전에 확정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공급 구조 변화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시장조사 기관 트렌드포스는 2027년에도 HBM 세대 진화에 따라 다이 면적이 계속 확대되고 수요도 증가해 공급 제약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KB증권 김동원 연구원은 AI 에이전트 시장이 클라우드에서 PC·모바일 등 엣지 디바이스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메모리 수요 증가세도 가속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CEO들이 잇달아 한국을 방문하는 배경도 HBM 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업계에서 지배적이다.














